← Work

Empathy

접촉과 연대

공감 — “자신의 신발을 벗고, 타인의 신발을 신는다.”

2014년 작가의 예술 여정의 전환점은 비극적 사고로 아들을 잃은 한 어머니와의 만남에서 비롯되었다. 그 손을 맞잡는 순간 밀려온 공감의 파장은 작가에게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고, 이 경험 이후 그는 인간의 몸을 자신의 매체로 삼기 시작한다—취약함과 기억, 관계적 현존을 담아내는 그릇으로서.

《놀리 메 탄제레(Noli Me Tangere)》로 명명된 이 작업은 겸손과 경외의 전례적 몸짓, 곧 세족(洗足)에서 출발한다. 작가는 깊은 고통을 겪어낸 이들—사별한 어머니, 이주민, 폭력의 생존자—의 발을 씻긴다. 발을 씻기는 행위는 필연적으로 신발을 벗기는 행위를 동반하며, 이는 자연스러우면서도 지극히 내밀한 드러냄의 순간을 이룬다. 고통과 이주와 기억으로 닳아온 그 신발들은 버려지는 대신 봉헌된다. 전기 전도체로 변환된 신발은 기능을 넘어, 현존과 증언, 그리고 한때 그것을 신었던 몸의 흔적을 담아내는 물질로 다시 태어난다. 참여자의 목소리는 사전 녹음되어 삽입된다. 때로는 속삭임으로, 때로는 끊어질 듯한 흐느낌으로. 이 목소리들은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증언하기 위해, 지워짐에 저항하기 위해 존재한다.

관객은 자신의 신발을 벗고 타인이 기증한 신발에 발을 들여놓도록 초대받는다. 자신의 신발을 벗지 않고서는 회로는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이어 관객은 작가의 손을 잡는다. 회로가 완성되는 순간 은은한 빛이 켜지고 목소리가 흘러나온다—오랫동안 침묵해온 목소리와 빛이 마침내 새어 나오는 것이다. 이 소리와 빛은 감춰졌던 진실을 드러낸다: 지금 딛고 선 신발이 한때 다른 누군가의 것이었으며, 그 고통은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해왔다는 사실을. 그중 한 켤레는 다름 아닌, 아들을 잃은 그 어머니의 것이다.

2025년 작가는 로완 윌리엄스의 공감론을 접하며 이 개념을 근본적으로 재사유하게 된다. 윌리엄스는 공감을 "타인이 느끼는 것을 그대로 느끼는 일"로 보는 통념에 반기를 든다. 대신 그는, 우리가 타인의 경험을 온전히 느끼거나 알 수 없다는 인식이야말로 진정한 공감의 출발점이며, 바로 그 한계야말로 윤리적 만남을 필요하고도 변혁적인 것으로 만든다고 본다. 특히 에디트 슈타인의 『공감의 문제』에 대한 그의 해석은 깊은 통찰을 제공했고, 작가는 현재 이 책을 연구와 작업 양쪽에서 적극적으로 탐구하는 중이다.

이 통찰은 작가의 관계 미학 전반을 재편하는 계기가 된다. 윌리엄스에게 공감이란 심리적 기법도, 감정의 거울도 아니다. 그것은 도덕적이고 신체적인 자세다—환상 없이, 타인의 고통에 온전히 다가설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그 앞에 현존하고, 열려 있고, 책임을 다하려는 의지. 그는 철학과 신학, 발달심리학을 가로지르며, 우리가 타인을 통해 비로소 자기 자신을 알게 된다는 것을, 몸과 몸이 관계 맺는 그 취약하고도 필연적인 위험 속에서—타인이 단지 "나와 같은 존재"가 아니라 환원 불가능한 타자임을 받아들이는 그 위험 속에서—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도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관점에서 공감은 더 이상 동일시의 문제가 아니라 차이를 가로지르는 현존의 문제가 된다. 인간적 연결의 진정한 깊이는 융합이 아니라, 가까움과 신비 사이의 존중받는 긴장 속에 있다는 것이다. 작가는 이 통찰을 바탕으로 새로운 접근을 준비하고 있으며, 이는 곧 신설될 사이트를 통해 공개될 예정이다. 이 지점에서 하나의 질문이 남는다:

신발을 벗는 단순한 행위는 어떻게 자아의 굴레로부터 스스로를 놓아주는 방식이 될 수 있는가. 

나는 이 작업을 《놀리 메 탄제레》라 부른다. “나를 붙들지 마라.” — 요한 20,17

에야스 아디 · 시리아 난민
독일 베를린, Z/KU

2017년 베를린 Z/KU에서 한 달간 레지던시에 참여하며 시리아 난민 에야스 아디를 만났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난민들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전하는 인터랙티브 설치를 함께 만들었다.

‘타인의 신발을 신어 본다’는 공감의 관용적 표현에서 출발해, 아디의 신발을 작품의 중심에 놓았다. 신발은 우리가 걸어온 모든 길을 함께한 물건이다. 그에게서 이토록 중요한 물건을 받아 변형하기에 앞서, 먼저 그의 발을 씻겨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 과정을 담은 영상은 공감에 깃든 돌봄과 겸손을 관객에게 보여준다. 영상에 등장한 신발은 관객 앞에 놓이고, 관객은 그 신발을 신도록 초대된다. 아디의 신발을 신은 관객이 내 손을 잡으면 전기 회로가 연결되어 아디의 목소리와 난민들의 이미지가 재생된다.

처음에는 작게 묻혀 들리지 않던 아디의 이야기가 침묵을 깨고 흘러나온다. 손을 잡는 따뜻한 몸짓이 그 목소리를 불러낸다. 나는 접촉이 ‘공감의 연결’을 만들고, 침묵 속에 갇힌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다는 생각에 몰두했다.

캄 찰스 · 남수단 난민
미국 네브래스카주 오마하, 베미스 현대미술센터

마르틴 부버는 『나와 너』에서 “모든 참된 삶은 만남이다”라고 쓴다(Buber, 1923: 11). 살아가고 삶을 경험하며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우리는 타인과 만나야 한다.

나는 자신의 말과 신발을 내어준 남수단 난민 캄 찰스와의 만남을 통해 내가 되었다. 자신의 신발을 벗고 캄의 신발을 신는 관객 역시 ‘자기 자신이 되는’ 만남으로 초대된다.

공연 중에는 캄의 목소리로 다음과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1. 나는 전쟁 속에서 잉태되고, 태어나고, 자랐다.
  2. 나는 꿈을 좇거나 내 삶을 계획할 수 없었다. 전쟁이 그 권리를 빼앗고 나의 내일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3. 나는 다른 아이들처럼 놀고 웃을 수 없었다. 전쟁이 나를 침묵시켰기 때문이다.
  4. 내 고향은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 살 수 없는 곳이 되었다.
  5. 전쟁 속에 있는 고향과 어머니, 자매와 형제, 삼촌들을 생각하면 늘 눈물이 난다.
  6. 사람들을 그 환경에서 데리고 나올 수 있다면 밤낮없이 일하겠다. 그들과, 혹은 필요한 누구와든 이 삶을 나누고 싶다.
  7. 당신에게 평화가 있다면, 나 같은 사람에게 조금 나누어 주겠는가.
  8. 나는 남수단에 평화가 오기를 바란다. 당신의 평화를 우리와 나눌 수 있는가.
  9. 친구들이 평화로운 내 고향을 찾아와, 그곳에서 나와 함께 평화롭게 행복하기를 바란다.
한종선의 목소리 ·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
서울, 국회의사당 앞

한종선은 폭력과 강제노동이 자행된 강제수용시설 형제복지원의 피해자다. 피해자들은 서울 국회의사당 앞에서 자신들이 겪은 고통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싸워 왔다.

세월호 참사로 아들을 잃은 어머니를 위하여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