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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cht

빛

미디어월 융복합 퍼포먼스
아시아문화전당, 광주, 한국
2018 · 2019년 재공연

크레딧
연출 / 영상   정자영
2018 아시아문화전당 4 Walls 미디어 공모 대상

1. 작업의 자리

아시아문화전당의 미디어월은 5·18 마지막 항쟁지였던 옛 전남도청 — 지금의 민주평화교류원 — 과 등을 맞댄 한 몸이다. 매쉬(Mesh) 재질의 미디어월은 영상이 상영되는 동안 그 뒤, 실제로 항쟁이 일어난 자리를 가린다. 표층의 스펙터클이 그 배후의 실제 장소와 사건을 은폐할 수 있다는 긴장이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도청 앞에 열사들의 얼굴을 내걸고, 그 앞에 서른여덟 개의 빛을 세웠다. 영상이 사라지는 순간 빛이 켜지며 얼굴들을 비춘다. 이미지의 소멸과 빛의 발현이 겹치는 이 찰나가 작업의 중심이다.

2. 빛이 여는 자리

〈Licht〉에서 빛은 시선의 방향을 바꾼다. 영상이 사라지고 서른여덟 개의 조명이 켜지면, 스크린 뒤에 가려져 있던 얼굴들과 옛 전남도청이 드러난다. 관객의 시선은 움직이는 이미지에서, 그 이미지가 잠시 가리고 있던 사람과 장소로 옮겨 간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눈에 보이는 밝음과 진리를 알아보게 하는 빛을 구별했다. 나는 이 구별을, 얼굴을 보는 일과 그 얼굴이 증언하는 삶을 마주하는 일 사이에서 생각한다. 빛이 얼굴의 윤곽을 드러내는 순간, 보는 일은 그 사람의 부재를 알아보는 일이 된다.

열 개의 장면은 ‘소리 없는 아우성’에서 ‘어둠 속으로’에 이르기까지 일어섬과 전진, 위로와 소멸의 시간을 통과한다. 그 뒤에 이어지는 ‘빛, 있었다. 그리고 빛의 부활’은 사라진 이들의 기억이 다른 사람의 손과 촛불을 통해 이어지는 장면으로 읽힌다. 이미지는 꺼지지만, 얼굴을 마주한 시선은 그 자리에 남는다.

3. 빛으로 열리는 얼굴

발타자르에게 얼굴의 인식은 존재론적 사건이다. 아기가 처음 마주하는 ‘엄마의 얼굴’에서 아름다움과 선함과 진리를 배우듯, 얼굴은 무한자와 유한자를 잇는 통로다. 반대로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것, 창세기의 카인처럼 “얼굴을 떨어뜨리는” 것은 관계의 단절이자 인간성의 상실이다.

이 설치의 사진은 이 대비를 그대로 보여준다. 격자로 늘어선 창, 그 안의 얼굴들은 각각 하나의 형상(Gestalt)이며 이름을 가진 죽음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반면 오른쪽 스크린에 흩뿌려진 붉고 금빛의 무수한 점들은 얼굴로 개별화되지 못한 채 흩어지는 빛 — 레비나스가 경계한 ‘전체성’의 이미지다. 레비나스에게 얼굴은 형상이 아니라 표현이며, 그 근원적 의미는 “살인하지 말라”는 최초의 계시다.

빛이 켜지며 매쉬 뒤 창들이 밝아지는 순간은 이 무리를 다시 얼굴로 되돌리는 사건이다 — 전체성의 무명한 점들을 다시 얼굴로, 다시 이름으로, 다시 “너”로.

서른여덟 개의 빛이 켜지는 순간, 관객은 화면 너머 실제로 존재했던 사람들의 얼굴과 마주한다. 작품은 그 만남의 조건을 만들고 물러난다.

4. 매쉬월: 우상과 이콘 사이

장뤽 마리옹에게 우상과 이콘의 차이는 이미지와 시선이 맺는 관계에 있다. 우상은 보는 이의 기대를 충족시키며 시선을 붙잡는다. 그 앞에서 관객은 자신이 보고자 했던 것을 되돌려 받는다. 이콘은 이 관계를 뒤집는다. 눈앞의 형상으로 다 담을 수 없는 존재가 시선을 불러 세우고, 보는 이는 자신 또한 마주 보이고 있음을 느낀다.

〈Licht〉의 매쉬월에는 이러한 시선의 전환이 일어날 가능성이 놓여 있다. 영상이 상영되는 동안 표면을 채운 빛은 관객의 눈을 끌어당기고, 그 뒤에 있는 옛 전남도청과 얼굴들을 가린다. 영상이 사라지고 뒤편의 조명이 켜지면, 시선을 붙잡던 표면 사이로 실제 장소와 얼굴들이 드러난다. 매쉬월의 물질은 그대로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관계가 달라진다.

나는 이 순간을 이콘적 경험의 가능성으로 읽는다. 얼굴이 보인다고 해서 그 사람의 삶과 죽음까지 모두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얼굴은 이미지로 다 담을 수 없는 한 사람의 존재를 일깨운다. 관객은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었으며, 그동안 무엇을 보지 못했는지 되묻게 된다.

매쉬월은 이처럼 이미지를 보여주는 표면이면서, 이미지가 물러날 자리를 마련하는 막이다. 작품이 만든 장면이 걷힌 뒤, 그 자리에 먼저 있었던 사람들과 역사가 관객을 마주한다.

5. 사라지는 현존

이 전환의 순간 퍼포머가 잠시 서 있다가 사라진다. 재현하지 않는다 — 다만 잠시 있음으로써 관객과 열사들을 이어주고 물러난다. 온전히 내어주면서도 소유되지 않는 이 현존은, 부활 후 엠마오에서 빵을 떼는 순간 “사라지신” 그리스도의 방식과 공명한다.

6. 마지막 밤, 최후의 만찬으로 가는 길

마지막 밤, 도청에 남은 이들은 남으면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떠나지 않았다. 죽음을 향해 자발적으로 머무르는 몸 — 이는 최후의 만찬의 자리와 겹친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라”는 도피가 아니라 자기증여의 말이다.

이 마지막 밤의 형상은 이후 미사의 최후의 만찬을 형상화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Licht는 광주의 사건을 성서적 틀로 해석한 작업이면서, 동시에 그 해석이 다시 최후의 만찬을 새롭게 보게 만드는 순환적 구조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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