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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li Me Tangere

나를 붙잡지 마라

Do not hold on to me · John 20,17
2014 – 진행 중 퍼포먼스 설치 · 세족 · 전도성 신발 · 목소리 · 빛 《Empathy》 연작(2017–2022)에서 →
I

이름을 부르다

접촉은 손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관객의 이름이 불리는 순간, 그는 익명의 관람자에서 응답할 수 있는 한 사람으로 나타난다.

요한복음에서 마리아는 예수의 모습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하지만, 자신의 이름을 들은 뒤 그분을 알아본다(요한 20,16). 이름은 몸이 닿기 전에 먼저 도착하는 접촉이다. 이 작품에서도 호명은 무엇을 하라는 지시보다 앞서, 서로 응답할 수 있는 관계의 자리를 연다.

신발을 내어준 사람 역시 익명의 고통을 상징하는 대상이 아니다. 그에게는 이름이 있고, 걸어온 시간이 있으며, 자신의 목소리가 있다. 그 이름을 부르는 일은 타자를 하나의 사례나 이미지로 소비하지 않으려는 출발이다.

II

신발을 벗다

Empathy — a pair of white shoes
《Empathy》 기록 속 신발. 한 사람의 몸과 그가 지나온 시간을 품은 물건.

신발을 벗는 순간 관객은 땅을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라, 땅에 의해 만져지는 몸이 된다.

모세는 거룩한 땅 앞에서 신발을 벗는다(탈출 3,5). 신발은 발을 보호하면서 몸과 땅 사이를 나눈다. 그 보호막을 내려놓으면 바닥의 온도와 질감이 몸에 도착한다. 벗음은 겸손이라는 상징에 앞서, 스스로 움직이고 통제하던 몸이 감촉을 받아들이는 몸으로 달라지는 경험이다.

맨발은 능동적으로 만지는 기관이면서 동시에 만져지는 표면이다. 작품에서 관객은 자기 신발을 벗고 타인이 기증한 신발을 신는다. 그러나 타인의 신발에 발을 넣는다고 해서 그 사람의 삶이나 고통을 대신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신발은 같아질 수 없는 두 삶 사이의 거리까지 느끼게 한다.

III

발을 씻다

The artist washing the shoe owner’s feet
작가가 신발 주인의 발을 씻긴 기록. 관객은 이 영상을 먼저 보고, 그 사람이 내어준 신발에 발을 넣는다.

발을 씻는 손은 타인의 삶을 이해하거나 소유하지 않는다. 그 손은 타인이 지나온 땅의 흔적 앞에 머물며, 그 몸을 통제하지 않고 돌본다.

발에는 먼지와 무게, 이동의 피로가 남는다. 요한복음 13장의 세족을 따라, 나는 신발을 요청하기 전에 먼저 그 발을 씻긴다. 씻는 사람은 몸을 낮추고, 씻김을 받는 사람은 자신의 몸을 타인의 손에 맡긴다. 만지는 손도 물과 피부에 의해 만져진다. 돌봄은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만 흐르지 않는다.

여기서 세족은 관객 모두에게 현장에서 반복하는 절차가 아니다. 신발 주인과 작가 사이에 먼저 이루어진 만남의 기록이다. 관객은 그 기록을 보며, 이제 자신이 신게 될 신발이 추상적인 ‘타자의 신발’이 아니라 누군가가 살아온 물건임을 마주한다.

이 글은 발과 땅의 촉각을 성서의 세족과 연결해 작품을 읽는다. 발을 씻거나 신발을 신는 일이 타인의 여정을 대신 체험하게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돌봄은 오히려 내가 대신 살 수 없는 삶 앞에 머무는 일이다.

IV

손을 맞잡고 놓아주다

Empathy — two people holding hands
그림 속 손이 아니라, 서로를 만지고 동시에 만져지는 두 사람의 손.

손을 잡는 일은 관계에 들어가는 몸짓이고, 손을 놓는 일은 그 관계가 소유가 되지 않도록 하는 몸짓이다.

타인의 신발을 신은 관객이 작가의 손을 잡으면 회로가 닫히고 빛과 목소리가 나타난다. 회로의 연결이 두 사람을 하나의 몸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서로 다른 두 몸은 차이를 지닌 채 접촉한다. 만지는 자와 만져지는 자의 자리는 그 사이에서 바뀐다.

이 만남을 손잡는 순간만으로 읽으면 친밀함이나 연대의 상징에서 멈출 수 있다. 나는 그 뒤에 손을 놓는 순간까지 함께 읽고자 한다. 접촉은 상대를 내 곁에 고정하는 일이 아니라, 떠날 수 있는 자유를 남기는 일이다. ‘나를 붙잡지 마라’는 촉각을 거부하는 말이 아니라, 만남을 소유하지 않는 관계로 여는 말이 된다.

V

빛과 목소리가 나타나다

Empathy — two people holding hands before the illuminated projectionEmpathy — two people facing each other after releasing their hands
《Empathy》의 만남. 두 몸의 접촉은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릴 자리를 연다.

관객의 몸은 타자를 대신 말하지 않는다. 이미 녹음된 타자의 목소리가 들릴 수 있도록 회로의 일부가 된다.

빛과 목소리는 다섯 번째로 수행해야 할 별도의 동작이 아니다. 손을 맞잡아 회로가 닫히는 동안 일어나는 사건이다. 빛이 켜지고 신발 주인의 목소리가 들릴 때, 관객은 그 사람의 고통을 자신의 감정으로 재현하기보다 그의 말을 듣는 자리에 선다.

나는 이 사건을 리처드 커니의 anacarnation, 다시 육화함이라는 사유와 연결해 읽는다. 이것은 장치가 그리스도의 현존을 만들어 낸다는 주장이 아니라, 낯선 타자의 몸과 목소리를 통해 그리스도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작품의 신학적 해석이다. 관객이 그리스도를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두 몸이 타자의 목소리를 위한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다.

이름이 관계를 열고, 신발과 세족의 기록이 그 관계를 땅과 몸의 감각으로 이끈다. 손은 맞잡히고 다시 놓인다. 그 사이에 들린 목소리는 접촉이 끝난 뒤에도 한 사람의 말로 남는다.

함께한 사람들 · 작품 기록

신발과 목소리를 내어준 사람들의 이야기는 《Empathy》 연작에서 이어진다. 이 만남들은 익명의 고통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삶의 기록이다.

Empathy →

2014년,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잡은 것은 이 손이 아니라 그 손이었다.
예수를 만지고 싶던 갈망이 그때 방향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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